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.
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의 불씨가 타오른 역사적 장소이자, 풍요로움 뒤에 아픈 수탈의 기억을 간직한 땅이다.
그 중심지였던 고부 읍내 한복판에는 평범한 시골 마을 풍경 속에서 유독 눈에 띄는, 낯선 외관의 고택이 있다.
온 외벽이 삼나무 판자로 뒤덮인 이 집은 바로 '적산가옥'이다.
'적산가옥'은 '적의 재산'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.
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이 살던 주택으로, 해방 이후 그들이 남겨두고 간 집을 이렇게 불렀다.
오늘 소개할 이야기는 바로 이 93년 된 적산가옥을 둘러싼 어느 가족의 소중한 기억과 사랑, 그리고 집을 지켜온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.
이 집의 주인은 은기철 씨 부부.
은퇴 후 고향으로 내려온 그는,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이 낡은 적산가옥을 다시 손보기 시작했다.
그는 말한다. "돈으로 산 집이 아니라, 우리 가족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보물 같은 공간입니다."
이 집은 1932년, 일본인 금융조합장의 사택으로 처음 지어졌다.
해방 후에는 한국인 농협 상무가 거주했고, 1976년 은 씨의 아버지가 이 집을 사들였다.
당시 그는 양조장을 운영하며 성공한 사업가였다.
초가집이 대부분이던 시절, 이 집은 단연 돋보이는 고급 주택이었다.
어린 시절, 친구들의 부러움을 사며 학교에 다니던 기억은 은 씨에게 여전히 따뜻한 자부심으로 남아 있다.
아내 조명숙 씨에게도 이 집은 특별하다.
신혼 초, 시댁에서 함께 지내며 시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듬뿍 받았다.
특히 시어머니는 막내며느리인 그녀를 딸처럼 아꼈고, 그 시절의 정과 온기가 지금도 집 안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.
첫 딸이 태어난 곳도, 첫 손자가 잉태된 곳도 모두 이 집이었다.
집 안에는 그 시절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.
손빨래하던 옛 우물, 시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고풍스런 장롱, 그리고 마루에 보일러를 깔기 위해 떼어낸 오래된 나무판자 한 장까지도, 이 부부는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.
그 나무판자는 현재 거실 한쪽 벽에 고이 걸려 있다.
그냥 오래된 판자가 아니다.
그 위엔 은 씨 어머니가 즐겨 쓰던 찻잔과 가족사진이 놓여 있다.
마치, 세월과 기억을 전시하듯이 말이다.
그저 낡은 집이 아니라, 가족의 역사와 정이 살아 숨 쉬는 공간이 된 것이다.
하지만 세월 앞에 견딜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.
곳곳이 삭고 기울어진 집을 다시 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.
자재 하나, 못 하나도 함부로 바꾸지 않기 위해 손수 나무를 다듬고, 헌 벽지를 벗겨내며, 처음 이 집을 지었을 장인의 마음으로 천천히 고쳐 나갔다.
기와 아래 숨은 곰팡이를 걷어내고, 삼나무 벽을 다시 살리는 데만 수개월이 걸렸다.
"살리기 위한 복원이지, 새로 짓는 게 목적이 아니었어요." 은 씨는 그렇게 말한다.
돈 들여 새로 짓는 것이 훨씬 수월했겠지만, 그 안에는 부모의 손길, 아이의 웃음소리, 며느리의 정성이 모두 담겨 있었기에,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.
이 적산가옥은 단순한 집이 아니다.
세대를 이어온 가족의 기억이며, 고부면이라는 땅의 역사이고, 무엇보다 '시간이 준 유산'이다.
누군가는 낡은 집이라고 부를지 모르지만, 은 씨 부부에게는 과거와 현재, 그리고 미래를 연결해주는 끈과도 같다.
혹시 여행 중 정읍 고부를 지나게 된다면, 이 오래된 삼나무 집을 눈여겨보자.
이처럼 오래된 집 한 채는 단순한 공간이 아닌, 가족의 시간과 역사, 지역의 문화와 정신이 깃든 삶의 무대다.
그리고 우리는 때로, 그런 무대를 다시 조명해볼 필요가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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